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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

[박기성 칼럼] 아파서, 너무 아파서

대전주님의교회 담임목사

 

전국통합뉴스 박기성 칼럼리스트 | 며칠 전 드라마 <모범형사 2>가 종영되었습니다. 16부작 전편을 시청한 것은 아니지만 띄엄띄엄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편에서 형사 강도창의 대사는 가슴을 뭉클하게 해 주었습니다. 

 

강도창은 살인사건의 진범을 찾은 후 병원을 찾습니다. 그곳에 억울하게 죽은 정희주의 할아버지가 입원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혼수상태인 채로 침대에 누워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강도창은 “진범을 잡으면 뭐하냐”며 범인을 늦게 잡은 자신을 자책합니다.

 

그 옆에서 이 말을 듣던 이은혜가 “아저씨는 형사로서의 일을 다 하신 거예요”라며 위로합니다. 그러자 강도창이 울먹이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죽은 정희주 생각할 때마다 너무 아파서, 이렇게 아파하는 할아버지 생각할 때마다 내가 너무 아파서 미친 듯이 진범 잡으려고 뛰어다니 거다.”

 

할아버지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강도창의 진심이 전해진 듯 그가 병실을 떠난 뒤 감은 눈 너머로 조용히 눈물을 흘립니다. 강도창은 형사라는 직업의식만으로 진범을 잡으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피해자 가족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낀 것입니다. 

 

갈릴리의 나사렛 근처에 <나인>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곳에서 장례행렬을 만났습니다. 과부의 독자가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눅 7:13) “울지 말라”하시고,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사’는 그리스어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 단어는 “창자가 끊어질 듯한 마음”을 표현할 때 사용합니다. 예수님은 남편도 없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잃은 그 여인의 애끓는 마음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러한 ‘공감(共感)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우리의 뇌에는 신경계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인 뉴런(neuron)이 있습니다. 뉴런은 신체의 한 부분에서 다른 부위로 신경 신호를 전달하는 기능을 합니다. 쉽게 말해서 신경간의 소통을 이루게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뉴런 중에도 거울뉴런(mirror neuron)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거울처럼 반영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누군가 하품을 하면 옆에 있는 사람도 따라서 하품을 하게 되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 등장인물이 울거나 슬퍼하면 시청자도 따라 슬퍼하게 되는 까닭도 그런 이유입니다.

 

이러한 능력을 ‘공감능력(Empathy)’이라고 부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는 바울의 가르침은 이러한 공감에 대해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머릿속 거울은 닦을 수 없지만, 마음속 거울은 열심히 닦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직업이 목사여서가 아니라 ‘아파서’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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