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이 아니면' 의 저자 김연호 선생을 만나다.

  • 등록 2025.03.21 14: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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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놈도 밉지만 그들의 앞잡이 하는 조선순사는 더욱 얄미워
경천애족” 하나님을 위해, 백성을 위해 살리라
빈민굴 거지대장 김연호 헌병대 사령관과 맞서다
자치위원장 김연호 공산당 인민위원회와 사투
소련군정 재판관 “김선생은 영웅이요 학교를 맡아 주시오”
김구 백범일지를 건내주며 “김목사 함께 좋은 세상 만들어 봅시다”
서산에서 3.15 부정선거 규탄위해 경무대 찾아가 항의 수감
아들 김성호목사 “어린시절 아버지의 유명세에 나는 외로워”

 

전국통합뉴스 이인복 기자 |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이 아니면'의 저자인 고 김연호 선생(감리교 목사, 독립운동가, 농민운동가 )이 살아온 삶을 듣기 위해  김선생의 아들 김성호 목사(74세)를 만났다.

 

인터뷰 전날 혹시 인터뷰 가능하겠느냐 라고 의사를 물었고 김 목사는 “사실 서울에 사는 지인과 약속이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몸에 이상이 생겨서 병원에 검사를 받아야 하므로 취소를 했다”라고 하면서 “서울약속이 취소되었으니 오세요” 라고 하여 보내주신 주소로 출발했고 춘천에 도착하여 김 목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목사는 마침 병원 진찰이 끝났다고 하여 병원으로 찾아가 모시고 자택으로 향했다. 김성호 목사는 암치료를 위해 대학병원에서 가까운 춘천시 어느 작은 빌라 1층에 살고 있었다. 김 목사는 50세에 암진단을 받아 지금까지 25년간 암과 5번째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사실 4번째 암투병 때에는 완전히 고쳤다고 좋아 했었는데 최근 다시 전의가 되어 5번째 사투를 벌이고 있다고 했다.

 

김 목사의 외소한 몸은 한눈에 봐도 암투병 환자라고 느껴졌다.  그러나 반갑게 맞이하는 얼굴은 천상 예수님의 얼굴이었다. 점심식사를 하며 간단하게 이야기 하는 것도 괜찮지 않겠느냐? 라고 하며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식당으로 인도 하였다. 도착하니 미리 예약을 했는지 사장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김 목사는 춘천시성시화운동본부(민들레중보기도회)소속에 박은주 권사의 올케라고 소개 했고, 사장은 반갑게 인사했다. 닭갈비가 맛있게 익어가는 동안 김 목사의 입에서 이야기가 시작됐다.

 

 

김 목사의 부친 고 김연호 선생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 강원도 횡성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그러면서 “저희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노력을 무척 많이 하셨다고 들었어요”라며 "가정 형편이 얼마나 어려 웠던지 어머니는 첫째 형을 외가에 보냈고, 둘째 형은 시모에게 보냈고, 셋째 형은 이모에게 보냈고, 막내였던 어린 김연호 선생만 데리고 홍천읍에 있는 수천석 부자인 첩을 세명 둔 이규환이라는 집에 식모살이를 했다"고 했다.

 

이어 "김연호 선생의 모친은 9세가 된 어린자식을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홍천보통학교에 입학을 시켰다"라며 "모친은 학교에 찾아가 어려운 형편을 말하고 간곡하게 호소하여 1년간 월사금을 면제 받으셨다고 하면서 책은 이집 저집 찾아 다니며 헌책을 빌렸고, 공책은 벽지를 사서 실로 꿰매 만들어 학교에 보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1년을 마치고 2년째 되던 해 학교에 월사금을 못내 일단 교실에서 쫓겨나 벌을 받고 시작했다. 어렵게 2학년도 마치고 3학년 때에는 모친이 몇 해 일을 해서 벌은 돈으로 다시 횡성에 와서 셋방을 얻어 흩어져있던 형들을 모아 살았다"라며 "가난은 여전했고 모인 여섯 식구의 배를 제대로 채우지 못했다"라고 했다.

 

또 김연호 선생은 "어린나이에 신문배달을 하며 열심히 노력하여 부족한 학비를 충당하기도 했다"라며 "이렇듯 가난한 유년시절 김성호목사의 부친인 김연호선생은 가정을 위해 홀로 헌신 하셨던 모친에 대한 감사한 마음과 베풀어주신 사랑 때문인지 또래 아이들과는 달랐다"라고 말했다.

 

 

김성호 목사는 “아버지는 작문실력이 좋았던지 나의 연필 이라는 제목으로 '나이를 먹으면 먹을 수록 점점 작아지는 나의 연필' 이라고 작문을 써서 제출 하였는데 그것으로 적지 않은 칭찬을 받았다고 합니다” 라고 했다.

 

그러면서 “5학년 6학년 고학년이 되면서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라며 "우리나라를 일제에 빼앗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어른들에게 우리나라 국기는 어디에 있느냐 라고 물었고 향교에 가면 있다고 하여 향교정문에 그려져 있는 태극문양이 국기라는 것을 보고 알게 되어 집에 와서 종이에 태극기를 그리기도 했다"라고 회상했다.

 

"그 후 김연호 선생은 또래 아이들을 모아 나무로 총을 만들고 총 끝에 광소목대 쇠붙이로 칼을 만들어 꽂고 학교가 끝나면 날마다 산에 올라가 군사훈련을 하고 무리를 지어 지나가는 일본아이들을 잡아 두들겨 팼다“라며 "일본학생들은 그들의 부모에게 일렀고, 그들의 부모는 대부분 경찰이나 높은 계급에 있었던 터라 학교교장에게 퇴학시키라고 항의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경찰이 조사를 하였는데 배후가 없었기에 단순한 훈시와 책망을 받고 13세에 겨우 보통학교를 마쳤다” 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그때부터 위험한 요지 인물이 되어 어딜 가면 경찰에 꼭 보고 하라고 했다” 라며 “왜놈도 밉지만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조선 순사가 더욱 얄미웠다” 라고 말했다.

 

 

김성호 목사는 “아버지는 축구를 좋아하여 둥굴게 축구공을 만들어 일본인 소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공이 일본학생에게로 향했고 그 공을 일본학생이 멀리 차버려 찾지 못하게 되자 아버지와 일본학생이 말싸움이 벌어졌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교장이 유리창을 뛰어 넘어 오더니 아버지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왜? 남의 학교에 와서 떠드느냐? 어서 나가라”라고 했고 이에 김 선생은 나도 학생이고 저 아이도 학생인데 두 아이의 사정을 알아보고 타이르던지 때리던지 하는 게 옳지 무턱대고 때리는 법이 어디 있느냐?” 라고 따져 물었다.

 

그런데 교장은 오히려 “조선 사람은 더럽다 조선 사람은 모두 도적놈이니까 나가라” 라고 소리를 질렀다"라며 “지난번엔 조선인 아이가 화초를 꺽어 갔다고 하며 호통을 쳤다"라며 "그 말을 듣고 범 같은 성격이 발동 된 13세 작은 키의 부친은 키가 큰 교장의 넥타이를 잡고 매달려, 머리를 박고, 물어 뜯고, 발길질을 했다"라고 했다.

 

갑작스럽게 목이 조여 정신을 못 차리던 교장이 잠시 후 그 큰 손으로 제압 하였고, 부친은 무척 많이 맞았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던 일본인 학생 수십 명이 달려들며 “조선인은 나쁘다” 라며 욕을 퍼부었다고 했다. 가까스로 도망 나오면서 아버지는 “망할 놈의 자식 때가 오면 보자”라고 소리쳤고 “일본은 분명히 망하고 조선이 독립 될 것이다”라고 믿었다고 했다.

 

이 일이 있은 후 형사들이 집에 찾아와 수색을 하였고 그 중에 형사 신씨는 민족에 양심이 조금은 남아 있는 사람으로 아버지를 무척 동정하면서 “네가 그래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나, 감옥에 들어가면 네 앞날은 어두워져 결국 너만 손해야” 라며 "그는 이후 경찰서에는 좋게 보고했던 것으로 생각했다"라고 했다.

 

그 일로 부친은 퇴학의 위기에 처했고 다행히 교장이 일본소학교(심상소학교) 교장에게 찾아가 졸업반이니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해 무사히 졸업하게 되었다고말했다. 그 뒤에 안 일이지만 같은 반 학생 중에 어른들이 있었는데 아버지를 퇴학 시키면 난동을 부리려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13세 소년 때부터 독립운동가 기질을 보였던 김성호목사의 부친은 일본순사의 감시대상이 되어 어딜 가든 보고를 해야 했고 심지어는 책을 보아도 무슨 책을 보느냐며 조사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김연호선생은 “나는 죄인이 되었다 나라를 사랑하는 죄인이 된 것이다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애국자이지 왜 죄인인가? 그러나 주권을 잃은 식민지 백성은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살인강도의 죄보다 더 큰 죄가 되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는 어떻게 하든지 나라를 되찾아 한국의 대통령이 되어서 미국의 에이브레햄 링컨처럼 훌륭한 지도자가 되어 덴마크의 구룬트비히 같이 이상사회를 실현해야 겠다 라고 했다고 한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이 아니면 책 35쪽)

15세가 된 김연호선생은 시장을 자주 갔었는데 이유는 '가난을 이기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 라고 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자판을 놓고 과일을 파는 아저씨에게 “아저씨 과일 장사는 어떻게 하는 건가요?“ 라고 물었고 과일장수는 ”어 과수원에서 사와서 팔면 되지“ 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김연호선생은 과일을 사기 위해서 종자돈을 마련해야했고 그 방법으로 물고기를 잡아서 시장에 내다 팔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개구리를 잡아 개울가에 나가 낚시대 여러 개에 개구리를 달아 멀리 던져놓고 집으로 돌아와 다음날 아침 일찍 나가 낚시를 걷어보니 메기와 장어가 잡혀 있었다고 한다. 잡은 메기와 장어를 가지고 시장에 나갔고 오후가 되기까지 물고기가 팔리지 않아 말라 비틀어졌다고 한다.

 

그 모습을 측은히 여긴 어떤 아저씨가 그 물고기를 사줘서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과수원에 가서 땅에 떨어진 낙과를 사서 팔기 시작하여 여름에는 참외 등을 팔아 남는 돈으로 닭도 여러 마리 사고 돼지 새끼도 사서 키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학을 하시고 유랑을 즐기셨던 가정 경제에는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았던 김연호선생의 부친이 돌아왔다고 한다. 아버지를 오랫동안 못 봐서 그런지 부친에 대한 애정은 없었고 게다가 모친과 김연호선생에게 폭력과 욕설을 하는 등 해를 많이 끼쳤다고 한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 갔고 작은 돼지는 제법 커서 어미 돼가 되어서 곧 교배를 해야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한다. 하루는 학교에 운동회가 있어서 물건을 팔러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돼지가 보이지 않자 땅을 파고 도망가 버렸나? 걱정하던 그때 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친이 다가와 “그 돼지는 천당 갔다. 네 아버지의 외상 술값을 받으러 술집주인이 찾아왔다가 돼지를 보더니 그냥 끌고 갔다" 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속이 상한 김연호 선생은 “술은 집안에 원수, 나라의 원수, 내가 술을 입에 대면 개새끼다”라고 하면서 “내가 어떻게 장만한 돼지인데 이제 곧 교배를 하여 새끼를 많이 낳을 텐데” 하며 어린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장사는 마음에 잡히지 않아 모두 포기하고 결국 자살을 결심 했다고 한다.

 

여러 차례 시도를 했었지만 그때마다 동네 사람들이 구해줬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산에 올라가서 나무 가지에 목을 메어죽으려고 하는데 그 순간 멀리서 교회 종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그래 죽기 전에 교회나 한번 가봐야 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 교회에 찾아갔고 목사님의 설교에서 자신과 똑같은 신세의 요셉의 이야기를 하였다고 한다.

 

그 말씀에 용기를 얻어 다음에 한번 더 그다음에도 한번 더 이렇게 교회에 계속해서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결국 꿈과 희망을 얻어 '경천애족' 하나님을 위해, 백성을 위해 살아야 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교회에서 믿음 좋은 장로님을 만나게 되었고 장로님은 소년 김연호선생의 성실함을 보시고 공부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몇 년 후 이태선, 윤춘병, 장수철, 박재훈 등과 함께 평양요한학교 1회로 입학 했다고 한다. 신학교 시절에는 거지들이 모여 사는 빈민굴에 들어가 옷을 팔아 그 돈을 보테서 교회를 세우고 1층은 어린이 주일학교 2층은 장년부 예배실을 만들었다고 한다.

 

신학생 김연호선생은 빈민굴 사람들과 침식을 같이하고 낮에는 신학교에 밤에는 야학을 만들어 2개 반으로 나누어 하나는 어린이 다른 하나는 청소년 반으로 편성해 국어, 산수, 역사 등을 가르쳤고 아울러 조기회 M.R.A 강령인 절대정직, 절대사랑, 절대무사 등을 외우게 하고, 청소년들을 줄지어 대동강 강가로 하나 둘, 하나 둘 이렇게 몇 번씩 뛰게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한 이유는 그들의 게으른 정신과 무기력한 정신을 개혁하려는 이유였다고 한다. 취침은 보통 밤12시에 하고 기침은 아침 4시에 했다고 한다. 빈민굴에서의 호칭은 거지대장이었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아이들이 모여들어왔고 학교기숙사에서 누룽지 등을 얻어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기도하며 신앙과 나태해진 정신을 개혁 하여 그 후 공장에서 일감을 구해 와서 일을 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빈민굴에서 생활을 하고 있을 22세 무렵 어느 날 일본헌병대에서 몇 번 조사를 왔다고 한다. 책꽂이에 있는 최남선 저서의 조선역사 책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 역사책을 증거물로 압수해 갔다고 한다. 그로인해 일본 헌병대는 김연호선생을 민족주의 전파 사상범으로 몰아가려 했던 것이다. 그날 밤 빈민굴에 도착하니 낮에 헌병대 차가 와서 선생을 체포하려고 했으나 없어서 호출장만 남기고 갔다고 전해주었다.

 

호출장에는 내일 아침 9시 평양 헌병대 사령부로 출두 할 것 약속을 어기면 엄벌에 처함 7월22일 이라고 적혀있었다고 한다. 당시 부친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었다고 한다. 왜냐면 주기철 목사, 최권능 목사 등 유명한 목사들과 애국자들이 속속 체포되어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문에 의하면 헌병대에 끌려가면 최하 병신이 되어서 나온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몹시 두려운 마음에 빈민굴 형제들과 밤새 찬송하며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선생이 죽으면 좋은 지도자를 주실 것이라고 유언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기도 하던 중 갑자기 마음에 큰 빛이 왔다고 한다, 그것은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열매가 많으리라 너는 법관 앞에 설 때 무슨 말을 할까 염려 하지 말아라” 라는 성경말씀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 후 마음이 평안해지고 담대해 졌다고 한다. 그러면서 “내 나이 이제 22세 사람이 한번 죽지 두 번 죽나 세상에 태어나 하나님과 민족을 위해 살다가 헌병대에 끌려가 죽으니 얼마나 보람이 있는 일이냐? 남이장군은 남아 이십 미평국이면 후세수청 대장부 랄까? 하였는데 젊은 나이에 의롭게 죽는다면 주님나라의 생명의 멸류관이 기다리고 있고 민족사에 빛날 것이니 나의 후계자가 열,스물로 늘어날 것을 생각하니 미칠 듯 기쁘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이 아니면 책 73쪽)

 

다음날 아침 일찍 헌병대에 도착했고 10시쯤 되니 그때서야 특무계 계장의 심문이 시작됐다고 한다. “주소? 본적? 성명? 나이? 학업? 스승? 친구?”등을 물었고 빈민굴에 들어간 동기등 기본적인 사항을 물었다고 한다. 그러더니 “너는 기독교인이지?” 라고 물었고 김선생은 “그렇습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럼 데라스이마까미(천조대신)가 높은가? 네가 믿는 예호바 하나님이 높은가?” 라고 질문을 했다고 한다. 선생은 잠시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번개같이 지혜가 떠올랐고 “그것은 말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답했고 그 답변에 어이가 없다는 듯 계장은 “왜 말할 수 없는가?” 라며 재차 질문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왜냐면 그것은 불경이기 때문 입니다 성경에 여호와는 거룩하신지라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라고 하였고, 일본제국의 헌법에도 천황은 신성하니 침범하지 못한다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과 천황을 동시에 불경을 범하게 되므로 말할 수 없습니다” 라고 완강히 거절했다고 한다.

 

계장은 할 수 없이 다음 심문으로 “너는 민족주의자 아닌가?” 라는 질문했고 김연호 선생은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을 하니 “그렇다면 지금도 그런 사상으로 사는가?” 라고 재차 질문을 했고 선생은 “나는 과격한 민족주의자인데 예수님을 믿고 지금은 철저한 기독주의자 박애주의자가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계장에게 미소를 띠며 ”이번에는 내가 한번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계장이 ”말해봐라“ 라고 허락 했고 김선생은 “내가 알기로는 일본은 침략적 야욕을 가지고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 아시아 제 민족을 해방하기 위하여 싸우는 전쟁이기에 해방전이요 성전이라고 하지 않았소?” 이 말에 계장은 “그렇다” 라고 답했고 선생은 갑자기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거세게 “쾅” 하고 치며 격앙 된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어 “대동아 전쟁이 아시아 제 민족의 공존 공생하는 사회를 만드는데 그 목적과 이념이 있다면 아세아 공영권이 실현 되는 아침 조선민족은 자동으로 독립민족이 돼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내가 조선 사람으로 조선민족의 복리증진을 위하여 일하는 게 무엇이 죄가 된단 말인가?” 계장은 끝까지 듣고 있다가 당당하게 단수가 높은 질문에 제대로 답변을 못하고 심문서류를 그대로 헌병 사령관실로 넘겼고, 잠시 후 헌병대 사령관실에 불려 올라갔다고 한다.

 

사령관은 매섭게 찢어진 눈매에 길게 치켜 올라간 콧수염을 길렀고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더 무섭게 보이려 했으나 그런 모습에도 김선생에게는 하나도 두렵지 않았었다고 한다. 왜냐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무섭지가 않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마도 하나님께서 두려움을 이기는 힘을 주셔서 그랬던 것 같다고 했다. 사령관은 모든 조서를 훑어보더니 “이것이 네가 대답한 말이 맞느냐?”라고 물었고 김 선생은 “그렇소”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사령관은 “스무 살 된 놈이 광장하다 너 같은 훌륭한 머리를 가진 학생이 고등고시 합격을 해서 훌륭한 지도자가 되지 않고 어째서 빈민굴에 들어가 있는가?“ 라고 하면서 ”빈민굴에 있기 때문에 불경스런 사회주의자로 볼 수 밖에 없지 않는가“라고 하였다고 한다.

 

김 선생은 이때가 기회다 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각하! 일본,독일,이태리 3대 맹방은 세계 3대 문명국이 아닙니까? 그런 세계3대 문명국의 하나인 일본제국 안에 있는 조선 평양 대도시에 빈민굴 기생충(소매치기,강도,매음굴,아편굴 등)사회가 있다는 것은 일본의 수치가 아닙니까? 나는 학생 신분으로 빈민굴에 들어가 모든 사회악과 불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교회와 야학교 그리고 탁아소를 만들었고 무산아동100여명을 초등학교에 입학시키고 공장에서 일감을 얻어다가 직업을 만들어 주는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나라에 월급을 달라고 한적도 없고 국법에 저촉된 일도 한 적이 없는데 왜 여기 까지 오라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하였고 한다. 이에 사령관은 상기된 얼굴로 “됐으니까 나가라” 라고 하였다고 한다. 나오면서 죽을 각오로 헌병대에 왔다가 매 한대 맞지 않고 개선장군이 되어 사령부를 나와 빈민굴로 향했는데 그때에 발걸음은 “나는 것 같이 가벼웠다”라고 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이 아니면 책 77쪽)

 

몇 년 후인 1945.8.15에 광복이 되었고, 스탈린과 김일성의 공산주의와 이승만의 민주주의의 이념이 팽배하게 대립 할 때 북한(평양)에서는 스탈린과 김일성 주도하에 북조선인민민주공화국을 세우려고 한참 진행 중에 있었고, 광복 후 얼마 간은 그야말로 무정부 상태여서 경찰도 관리도 법도 없으니 이웃의 물건을 훔쳐가도 처벌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남의 소를 잡아먹는 등 자유를 빙자한 범죄가 난무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45.8.17. 면 자치위원회가 결성되어, 민족주의자이며 학식이 가장 많았던 김연호선생이 자치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취임 후 곧바로 가장 급한 세 가지 일을 시작 했다고 한다.

 

첫째는 동만에서 밀려 나오는 피난민 구제하기 였고

선생은 동리마다 돌아다니며 강연하고 귀환 동포 구제를 위하여 쌀과 감자 등 있는 곡식을 헌물 할 것을 호소하였는데 면민들이 양식들을 즐겁게 내놓았다고 한다. 그 곡식으로 주먹밥을 만들고, 감자등을 삶아서 역전에 나가서 배고픈 피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둘째는 학교를 여는 일이었다.

김연호선생은 일본인 교장에게 직접 학교 마당에 있던 신사에 불을 지르게 하였고 일본식 교육만을 해 오던 학교의 문을 다시 열어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쳤다고 한다.

 

셋째는 치안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 했듯이 해방이 되니 무정부 상태임을 알고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도둑놈이 되었다고 한다. 치안 경비대를 조직하여 일본인에게서 인수한 총과 군도를 가지고 치안에 힘쓰고 죄를 지은 사람을 때리지는 않고 옥에 잡아넣고 3일 정도 굶기면 죽는 줄 알고 벌벌 떨었다고 한다.

 

김연호선생은 풀어주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같이 해방이 되어 즐거울 때에 도둑질 하는 놈은 악질 민족반역자이다” 라고 다시한번 엄포를 하며, 책상 앞에 앉혀 놓고 연세가 많은 사람에게는 노인장, 형님, 그리고 젊은 사람은 자네 라고 하면서 “여보세요 이렇게 좋은 데 좋은 일을 해야지 나쁜 일을 하면 되오? 해방은 되었지만 아직 독립은 아니 되었소 정신 차려야 하오” 라고 눈물로 호소하면 그도 울고 나도 울었지 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이번은 용서하지만 재범 시는 용서치 않을 것이오” 라며 타일러서 내 보냈다고 한다. 그 후 김연호선생의 관내에서는 죄인이 없고 치안이 확보 되어 평화로웠다고 한다.

 

몇 년 후 스탈린과 김일성의 주도로 북조선인민민주공화국이 세워졌고 체제유지를 위해 민주주의자들을 하나 둘씩 제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이웃 면 자치위원회에서 도움을 청해 왔다고 한다. 이유는 기미년 3.1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2년간 옥고를 치른 이종덕씨의 조부가 면민의 추대로 자치위원장이 되었는데 친일파와 공산당이 합작하여 인민위원회로 개조하려고 면 유지들을 조직하여 자치위원회를 완력으로 접수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민족주의 진영을 친일파와 공산당이 접수한다는 말에 분함을 참지 못해 10여명을 데리고 갔다고 한다. 좌우 양쪽 대표를 앉혀놓고 그들의 말을 들어보니 인민위원회 쪽이 불법이고 자치위원회쪽이 합법이라고 종용하고 있는데 갑자기 바깥이 소란하여 내다보니 인민위원회 사람들이 송동면 자치위원회(김연호)가 관인면 자치위원회를 치러 왔다고 면민을 선동하여 칼, 도끼, 낫, 쇠스랑, 괭이 등을 가지고와서 김연호선생과 일행들을 괭이와 창 등으로 찌르고 피를 흘리며 쓰러지면 발로차고 몽둥이로 때렸다.

 

그런다음 10명을 철사로 명태를 묶듯 해서 결박하여 창고에 집어 넣었다고 한다. 그것도 모자라 불로 태워 죽이겠다 라고 했단다. 김연호선생은 최후에 기도를 했다고 한다 “주여 우리들의 생명을 받으소서 ”라고 그랬더니 갑자기 밖에서 총소리가 들리며 소련군 헌병대가 들어왔다고 한다. 우리들 중 몰래 빠져나간 사람이 소련군 헌병대에 관인면에 폭동이 일어났다고 신고하여 긴급으로 출동했다 한다. 거의 죽다시피 한 김연호선생과 일행들을 헌병대 차에 태우고 철원에 있는 병원에 입원시키고, 몇일 후 겨우 거동이 가능하게 되자 다시 인민 보완대 유치장에 수감되었다고 한다.

 

재판이 시작되었고 자치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 대립이었다고 한다. 재판관은 소련헌병대의 중좌 이고 한국인2세가 통역을 맡았다고 한다. 재판은 불리하다고 여겼는데 이유는 이미 친일파와 인민위원회가 손을 잡고 금전으로 매수를 한 것으로 보였다고 한다. 그들은 김연호선생을 반동분자로 몰아세웠다.

 

어처구니가 없던 김연호선생의 변론에서 “이승만,김구선생도 반동분자로 몰리는 판국이니 이 땅에 살면서 창씨개명을 하였고, 일본 배급을 타 먹은 내가  애국자는 될 수 없다. 그러나 13세부터 독립만세를 불렀고 스무살 시절에는 평양 빈민굴에 들어가 거지대장 노릇도 하였다 그런 나를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반동분자로 몰아세우다니 나는 바로 살기 위해서 11월인 지금도 반바지 차림이다” 그러고는 억울하고 분하여 깔고 앉았던 의자를 번쩍 들어 재판석에 내 던졌다고 한다.

 

그때는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한다. 그 순간 한국인 2세 통역관이 권총을 김연호선생의 가슴에 대고 쏘려고 했다고 한다. 김연호 선생은 통역관을 향해 “너는 조선 놈 아니야 쏠 테면 쏘라” 라고 했고. 그때 생각하면 참으로 위험한 순간이었다 라고 회상했다.

 

급박한 광경을 지켜보던 소련헌병 중좌는 쏘지 말라고 호령을 한 모양인지 소련헌병 중좌는 “껄껄껄”호탕하게 웃으면서“김선생 됐소 됐소 김선생은 영웅이요”그리고는“여보 김선생 우리 인민 정치학교에 교수가 되어 주던지 아니면 농업고등학교에 교장이 되어 주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김연호선생은 잠시 성질을 누그러뜨리고 “내가 아직 몸이 완쾌되지 않았고 마음도 산란하니 생각해 볼 여유를 주시오” 라고 대답했고 그일 후 김연호선생은 10일 만인 12월23일 “저들이 나를 데이러 올 것이 분명하다” 라고 하며 38선을 넘었다고 한다. 한탄강을 건널 때에는 손발이 어는 것은 고사하고 심장까지 마비되는데 그럼에도 결사적으로 얼음물 속을 건너왔다고 한다.

 

얼마 후 남쪽에선 우남 이승만의 주도로 건준위가 결성되었고 이에 백범 김구 선생은 북쪽의 김일성을 설득해서 하나의 국가로 만들겠다고 올라간다는 것이다. 김연호선생은 백범 김구 선생이 북에 올라가기 전에 은밀히 만나서 “선생님 지금 북에 올라가시면 좌익으로 몰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정치적으로 크게 어려워 지실 겁니다 가시지 마시길 바랍니다” 라고 간곡히 요청하였데 백범 김구선생은 ”김목사 잘 아오 그러나 내가 가야 하는 것은 운명이요 마지막 남은 소명이라고 생각하오“ 라고 하면서 비서와 함께 급하게 북으로 떠났다고 하였다.

 

김연호 선생이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백범 김구선생과는 같은 민족주의자 이며 비록 짧은 기간 이었지만 일제에 대항했던 투지와 평양에서의 빈민굴 생활, 지치위원회의 성공과 공산당 인민위원회와의 대립사건 등을 처음 만났을 때 김구선생에게 말했을 것이라 추측되며 확실한 것은 김연호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백범 김구 선생이 김연호선생을 만나서 백범 본인이 직접 서명한 백범일지를 김연호선생에게 전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김연호목사 우리함께 좋은 세상을 만들어 봅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1950.6.25. 김일성은 남침을 하여 3년간 동족상전의 고통을 남기고 남과 북이 갈라지면서 전쟁은 휴전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김연호선생은 1959년 서산군에 위치한 서산제일감리교회에 부임하게 된다. 서산(태안포함)과 당진의 감리사로 사역을 감당하였다고 한다.

 

 

1년 후 1960년3월15일에 치뤄진 부통령 선거가 부정선거로 밝혀져 당시 김연호선생은 서산에 몇몇 유지들에게 규탄하러 같이 가자고 했지만 모두 거절 하여 할 수 없이 혼자 서울 경무대에 찾아가 부정선거에 대해 항의를 하다가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가 4.19혁명이 일어나면서 이승만대통령이 하야 하고  선생도 석방되어 다시 서산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돌아오니 서산경찰서 서장과 서산군수가 찾아와 인사를 했다고 한다.

 

그 후 선거철이 다가오자 김연호선생과 잘 아는 정치 지인들이 찾아와 후보로 뛰어 달라고 부탁하여 선배목사와 동료 목사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라고 물었고 목사들은 사역에 매진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후보직을 사양했다고 한다.

 

 

끝으로 김연호선생의 아들인 김성호목사에게 아들로써 아버지에 대한 에피소드를 물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의외였다 김성호목사는“내가 고2때 아버지에게 약속을 했었어요 뭐라고 했냐면 나는 아버지처럼 유명해지지 않겠습니다.” 라고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왜냐면 아버지께서는 유명해 지시니까 자기시간과 특히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추억이 별로 없어요 어렸을 때 나는 너무 외로웠어요”라고 하면서 김 목사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러면서 “그래서 그랬는지 몰라도 결혼 후 나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고 당연히 우리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도 많이 가졌어요. 라고 하면서 김목사는 하나님과의 약속도 있었는데 그건 작은 교회만 맡기로 서원하고 그가 부임하는 교회가 개척하거나 이미 있었던 교회 이거나 상관없이 성도가 150명이나 200명이 되면 떠나겠다고 서원했는데 지금까지 그 약속을 모두 지켰다고 한다.

 

그럼 지금까지 거처 간 교회가 몇 개나 됩니까? 라고 물었고 김목사는 눈을 크게 뜨며 “그건 모른다 확인한바 없고 확인 할 필요도 없다” 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혹시  많았나요?” 라는 질문에 김목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면서 혹시 아쉬웠던 점은 없었나요? 라는 질문에 굳이 말하자면 청년때 유명한 음대교수님이 음악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고 음악을 전공하면 어떻겠냐고 했는데 가정 형편상 하지 못했던 것 그것이 아쉬운 점 이라면 그것 말고는 100%로 약속을 지켰다고 하면서 흐믓하게 웃었다.

 

이와 같이 김연호 선생은 목사이면서 민족주의자,독립운동가,농민운동가 교육자등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빼앗긴 나라를 생각하며 언젠가는 되찾을 것이란 믿음으로 빈민굴에 들어가 거지대장이 되어 나약한 백성의 정신을 신학과 그만의 방식으로 계몽시켰고 또한 질서가 없는 혼돈의 시대에 사회운동과 농민운동등을 전개하면서 대한민국의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 우리는 3월15일(부정선거)그리고 다가오는 4월19일(4.19혁명)를 맞이하면서  김연호 선생과 같은 민주화운동을 포함한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을 절대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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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복 기자 7207bo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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