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통합뉴스 박기성 칼럼리스트 | 오랜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은 음력(陰曆)으로 한 해가 시작되는 첫날을 설날이라 부르며 명절로 기렸습니다. 설날은 원단(元旦), 세수(歲首), 연수(年首)라고도 불립니다. 그런데 이 이름 외에도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또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그 특별한 이름은 ‘삼가는 날’이라는 뜻의 신일(愼日)입니다. 한 해가 시작되는 첫날이므로 “말이나 행동을 조심하여 경거망동을 삼가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야 1년 내내 아무 탈 없이 평안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에도 비슷한 절기가 있습니다. 유대교의 신년은 ‘로쉬 하샤나(Rosh Hashana)’라고 불립니다. ‘그 해의 머리’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날부터 2박 3일 동안 흰옷을 입고 지나간 해에 지은 죄를 회개하며 기도하며 보냅니다. 또한 죄를 씻기 위한 상징적 행동으로 타슐릭(Tashlikh)을 행합니다. 타슐릭은 죄의 상징인 빵 조각을 물(바다, 강, 물 웅덩이 등)에 던지며 지나간 해의 죄를 씻어내는 의식을 말합니다. 그리고 10일 후에 있을 속죄일(Yom kippur)을 준비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개인의 회개에서 민족적 회개로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이와
전국연합뉴스 박기성 칼럼리스트 | 우리교회 이 장로님이 사시는 아파트 근처에 작은 카페가 하나 있습니다. 어느 날 그곳의 여 사장님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사장님은 예전에 백화점에서 한 달에 적어도 7-8백만 원을 쓰며 살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형편이 나빠지게 되어 가정이 파탄 날 정도로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아무런 낙이 없이 살던 중에 친구가 전라도의 어느 시장에서 7천 원짜리 강아지를 사다 주었답니다. 그 강아지를 벗 삼아 동네를 산책하며 지내다가 우연히 문 닫힌 카페 문 앞에 붙어 있는 광고를 보고, 바로 전화를 하여 카페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그 카페는 그리 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손님도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장님은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고 말씀합니다. 예전에 누렸던 부요함은 모두 허망한 것이더라는 말씀도 덧붙였습니다. 카페에 들르는 손님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카페를 방문해 주시는 손님들에게 너무 감사하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꼭 상황이나 조건이 좋아야 행복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비록 상황이나 조건이 좋지 못하더라도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은 누구나 행복할 수 있습니다. 다음의 이야기가
전국연합뉴스 박기성 칼럼리스트 | 내가 TV를 시청하는 주된 이유 중의 하나는 뉴스입니다. 아침기도를 마친 후에 방으로 돌아오면 거의 반사적으로 내 손에는 TV 리모콘이 쥐어져 있습니다. 뉴스를 시청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뉴스를 들으면 머리가 아픕니다. 스트레스 지수도 상승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 두통과 스트레스의 주된 원인은 대통령 후보자들과 그들 곁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행태입니다. 선거일을 두 달 남짓 남기고부터는 그들의 상호비방이 더 수위가 높아지고 강해진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는 상대방에 대한 비난만 있고, ‘무엇(what)’과 ‘어떻게(how)’는 보이지 않습니다. 답답함과 부끄러움은 오롯이 국민의 몫입니다. 예로부터 한 공동체의 리더나 리더 그룹을 ‘원로’라고 불렀습니다. 원로란 ‘어른’을 뜻합니다. 나이가 많아서 어른이 아니라, 구성원들을 행복한 길로 잘 인도할 수 있는 지혜를 가졌기 때문에 어른입니다. 그런 어른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며, 사람들을 자신의 생각과 이익에 따라 갈라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설득하고 품어 통합하게 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 속 아버지와 같은 모습입니다. 탕자의
전국연합뉴스 박기성 칼럼리스트 | 며칠 전, 자주 방문하는 아동센터에서의 일입니다. 그 아동센터는 모 교회의 부설 기관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인 남자 아이가 생활복지사로 일하시는 사모님께로 와서 “저,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파요!”라고 말했습니다. 사모님은 아이의 이마를 만져 보시고는 손을 얹어 아이를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다. 기도가 끝나자마자 아이는 사모님께 물었습니다. “지금, 뭐하는 짓이에요?” 당황하실 만도 한데, 사모님은 아이에게 친절하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어, 네가 아프지 않도록 치유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어!” 그러자 아이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머리가 하나도 안 아파요. 신기해요!” 쪼개질 듯 아프다던 머리가 거짓말처럼 아프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는 아이의 대답도 재미있었지만,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시는 사모님의 행동에 대하여 “지금, 뭐하는 짓이에요?”라고 물은 아이의 천진난만함에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이가 집으로 돌아간 후, 사모님은 아이의 부모님 중 한 분과 전화통화를 하셨습니다. 전화 통화였기에 정확히 부모님 중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아이의 아버지인 듯 생각됩니다. 사모님은 아이의 아버지에게 아이의 상태가
전국연합뉴스 박기성 칼럼리스트 | 며칠 째 우리집 밥상에는 잡채가 올려 있습니다. 남 권사님과 김 권사님이 주일 아침 일찍부터 수고하여 여선교회 이름으로 각 가정에 나누어 주신 음식입니다. 덕분에 우리도 맛있는 잡채를 받아먹게 된 것입니다. 잡채(雜菜)는 그 이름이 말해주는 바와 같이 다양한 채소를 섞어 만든 음식입니다. 각각의 채소들이 당면과 섞이어 독특하고도 맛있는 음식으로 재탄생된 것입니다. 이런 음식은 잡채 말고도 비빔밥이 있습니다. 내 고향 익산시 황등에도 전주비빔밥 못지않게 유명한 비빔밥이 있습니다. 그곳은 그냥 비빔밥이 아니고 육회비빔밥입니다. 그리고 밥을 미리 비벼서 손님상에 나오기 때문에 ‘비빈밥’이라고도 불립니다. 이러한 섞임 음식들은 맛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음식문화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섞이는 것에 대하여 강하게 거부합니다. 서로 다른 종류의 가축을 교배시켜서도 안 되고, 두 종자를 섞어 뿌려서도 안 되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어서도 안 됩니다(레 19:19).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 취급하며 상종조차 하지 않았던(요 4:9) 까닭도 그들이 앗시리아의 식민지배 시기에 피가 섞였기 때문입니다. 이
전국연합뉴스 박기성 칼럼리스트 | 터키의 이스탄불은 참으로 신비한 도시입니다. 유럽과 아시아의 문명이 공존하고,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며, 이슬람과 기독교의 문명이 공존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탄불 이전의 도시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이었습니다.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 후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에 의해 함락될 때까지 콘스탄티노플은 1100년이 넘는 동안 동로마제국의 수도이자 제국 그 자체였습니다. 성벽은 얼마나 튼튼했는지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의 원인인 훈족의 아틸라조차도 이 성벽을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그런 난공불락의 성벽이 메흐메트 2세에 의해서 함락된 것입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며칠 전, 개기월식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는 오랜 공성전으로 양측 모두 지쳐 있을 때이고, 메흐메트도 휴전하자는 부하들의 요구에 갈등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때 월식이 일어난 것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월식은 대개 불길한 징조로 여겨졌습니다. 월식을 바라본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과 동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월식이 자신들을 향한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메흐메트는 달
전국연합뉴스 박기성 기자 | 남 권사님으로부터 카톡 문자가 왔습니다. 아마 권사님도 누군가로부터 받은 것일 텐데, 그 내용이 좋아 감동을 함께 나누려 내게도 보낸 듯 합니다. 어느 대학의 심리학 강의 시간이었습니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풍선 속에 자기 이름을 써서 넣고 바람을 빵빵하게 채워 모두 천장으로 날려 보내라고 했습니다. 한참 지난 다음에 교수는 자기의 이름이 들어 있는 풍선을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정해진 시간은 딱 5분이었습니다. 학생들은 자신의 풍선을 찾으려 부딪히고, 밀치다가 교실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5분이 흘렀지만, 자신의 이름이 들어있는 풍선을 단 한 사람도 찾지 못했습니다. 교수는 이번에는 아무 풍선이나 잡아 거기 넣어둔 이름을 보고 그 주인을 찾아주도록 하였습니다. 순식간에 모두 다 자기의 이름이 들어있는 풍선을 하나씩 받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교수가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지금 시험한 자기 풍선 찾기는 우리 삶과 똑같습니다.” 주어진 시간에 자신의 것만 찾으려 했을 때는 한 사람도 찾지 못했지만, 서로의 것을 찾아 주었을 때는 모두 금방 찾을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는 실험이었습니다. 마치 팔
전국연합뉴스 박기성 기자 | 속담에 “뒤로 호박씨 깐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뒤’는 ‘항문’을 의미합니다. 예전 어른들이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라는 말을 “뒷간에 다녀오겠다.”고 말한 것을 기억할 겁니다. 그런데 호박씨를 어떻게 ‘뒤’로 깔 수 있을까요? 옛날에 매우 가난한 선비가 살았다고 합니다. 선비는 글공부에만 매달리고, 살림은 오로지 아내가 맡아서 꾸려 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비가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와 문을 여니 아내가 무언가를 입에 넣으려다 황급히 뒤쪽으로 감추는 것이었습니다. 선비는 아내가 자기 몰래 혼자 음식을 먹으려고 한 것으로 오해하여 서운해 하며 뒤에 감춘 것이 무엇인지를 추궁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호박씨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기에 그것이라도 까먹으려고 집어 입에 넣어보니 쭉정이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내는 눈물과 함께 용서를 구했고, 선비는 아내의 그 모습을 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함께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구전되어 오다가 본래의 눈물겨운 사연은 생략되고 “뒤로 호박씨 깐다”는 말만 전해졌다고 합니다. 또한 그 뜻도 “겉으로 얌전한 체, 어리석은 체하면서 남이 보지 않는 데
전국연합뉴스 박기성 기자 | 미국 테네시 주의 한 작은 마을에 벤 후퍼(Ben Hooper)라는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벤 후퍼는 날 때부터 체구가 매우 작았고, 마을 사람들은 벤 후퍼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의 아버지는 르무엘 후퍼 박사였으나 혼외 자식이었기에 출생신고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결국 벤 후퍼를 고아원에 맡겼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기 자녀들이 그런 벤 후퍼와 어울려 노는 것을 원치 않았고, 아이들도 그를 놀리며 무시했습니다. 벤 후퍼는 그렇게 따돌림과 비웃음, 멸시를 받으며 어렵게 소년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벤 후퍼가 12살이 되었을 때, 마을의 교회에 젊은 목사가 부임했습니다. 그 목사는 어느 누구든지 사람을 그대로 받아주며 비난하지 않는 인자한 사람으로 소문이 났습니다. 어린 벤 후퍼도 그 목사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호기심에 그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에 가 보았습니다. 가긴 했지만 일부러 늦게 가서 살며시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예배 후에 예배당을 빠져 나오는데 그 젊은 목사가 벤 후퍼를 보고 “네가 누구 아들이더라?”며 아는 체를 했습니다. 순간 주변은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목사는 다시 웃으
전국연합뉴스 박기성 기자 | 1박 2일간 남부연회 주관으로 기도학교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은퇴를 앞둔 어느 목사님의 격려사가 기억에 남습니다. 그분은 “감리교회의 목사는 자신의 목회에 대하여 스스로에게 3가지를 점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복음적인가? 둘째는 사도적인가? 셋째는 감리교적인가?입니다. 특히 그분은 세 번째로 언급한 ‘감리교적인가?’에 방점을 두고 후배들에게 강하게 호소하셨습니다. 그분이 강조한 ‘감리교적인 것’은 다름 아닌 ‘기도’입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만이 목회를 목회 되게 하는데, 목회를 목회 되게 하는 스파크가 기도를 통해서 일어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한 목사가 영국을 여행하던 중 존 웨슬리의 고택과 집무실을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기도실로 들어간 그는 마룻바닥에 난 두 개의 구멍을 발견하고 그곳 안내자에게 물었습니다. “저것은 무슨 구멍입니까?” “목사님이 생각하시기에는 무슨 구멍 같으세요?” “글쎄요. 모르겠는데요. 혹시 쥐구멍이 아닌가요?” “천만에요. 저것은 존 웨슬리 목사님의 기도의 흔적입니다.”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던지 존 웨슬리가 무릎을 꿇고 기도한 그 마
전국연합뉴스 박기성 기자 | 예전에는 바울서신을 그리 즐겨 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바울서신을 자주 펼칩니다. 그의 말과 생각과 행동에 매력마저 느끼곤 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라는 그의 고백은 내 심장을 찌릿하게 합니다. C. J. 매허니는 <죄와 세상을 이기는 능력,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꼭 기억해야 할 한 예화를 들려줍니다. 앨리스는 월요일에 앵무새 한 마리를 샀습니다. 녀석이 말을 하지 않아서 다음날 앨리스는 애완동물가게를 다시 찾았습니다. “사다리가 필요하겠군요.” 점원의 말을 듣고 사다리를 샀지만 그날도 앵무새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네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점원이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앨리스는 그네를 하나 샀습니다. 그 다음날에는 거울, 그 다음날에는 자그마한 플라스틱 나무, 그 다음날에는 반짝이는 앵무새 장난감을 샀습니다. 일요일 아침, 애완동물가게가 문을 열었을 때 앨리스는 문 밖에 서 있었습니다. 손에는 앵무새장이
전국연합뉴스 박기성 기자 | 지난 주일(11월 7일)은 입동(立冬)이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몇몇 교인들과 함께 인근 대학 교정 내에 있는 커피숍에 들렀습니다. 커피를 마시고 헤어지려는 데 건물 옆에 있는 철쭉나무에 핀 철쭉꽃이 보였습니다. 4~5월에나 볼 수 있는 철쭉꽃이 겨울의 첫 날에 피어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신기하여 장로님께 “철 모르는 철쭉이네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장로님으로부터 돌아온 말이 재미있었습니다. “철 모르니 철쭉이지요.” 그 날 저녁부터 날씨가 흐려지더니 삼일 내내 차가운 바람과 함께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습니다. 철 모르는 철쭉꽃이 비바람에 괜찮은지 걱정도 되고 궁금해졌습니다. 무슨 오지랖인지 참지 못하고 우산을 집어 들고 결국 집을 나서 녀석이 있는 곳으로 가 보았습니다. 다행히 꽃은 무사했습니다. 얼마나 견뎌낼지 모르겠으나 이왕 핀 꽃이니 오래도록 버텨주기를 바라며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일찍이 전도서의 설교자는 모든 것에는 ‘때(time)’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날 때와 죽을 때, 심을 때와 심은 것을 뽑을 때, 울 때와 웃을 때,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