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통합뉴스 이승주 기자 | 우리는 순교를 고귀한 것으로 생각하고, 순교자를 신앙영웅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 죽음에 대해서도 아름답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첫 순교자 스데반의 죽음은 어떠했습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이 가장 증오하는 신성모독죄로 스데반을 처형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돌에 맞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는 고통 속에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행7: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건강검진 결과조차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염려하며 기다리는 우리의 눈으로 볼 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살이 찢기는 고통을 견디며 순교한 스데반은 위대한 신앙의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첫 순교자의 반열에 설 수 있었습니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 죽음의 두려움을 스데반 혼자 감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 주목했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안타까움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서서 그를 지켜보시고, ‘너의 고통에 내가 함께 하고 있다’, ‘이것이 네 삶의 끝이 아니다. 네게는 천국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가 본 것이 그에게 죽음보다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죽음의 고통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행7: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로라 한대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이유는 어떤 것도 나 홀로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내 눈으로 보지 못해도 스데반이 보았다면 우리는 믿을 수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 나그네로 산 야곱이 그 ‘험악한 세월’을 이길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이 ‘함께 있어 지키며 허락한 것을 다 이루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내가 하겠다’고 해서 순교자의 반열에 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감당할 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창47:9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창28: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또 한 가지, 우리는 생명은 귀하고 죽음은 나쁜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명으로도 일하시지만 죽음으로도 일하십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죽음으로 더 큰 일을 하셨습니다. 원죄의 저주를 끊어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와 처벌이 아니라 의롭다 인정받고 복 받는 사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엡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스데반의 죽음은 시대를 바꾸는 죽음이었습니다. 원래 평신도 사역은 봉사(구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사도행전 7장에서처럼 지혜와 성령으로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이전에 사도가 전담하던 말씀 사역을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람이 스데반이었고, 그의 순교는 모두가 이를 인정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죽음을 통해 일하신 것입니다.
행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렘33:2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우리 현대사에서 고문으로 쓰러진 박종철의 죽음은, 서슬이 퍼렇던 군사독재시대를 끝내고 직접선거를 통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진일보하게 되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다 쓰러져가던 평창 장평교회는 지방 청장년선교회를 위해 일하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소천하신 집사님의 안타까운 죽음을 계기로 온 지방과 광림교회의 헌신으로 새로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죽기까지 헌신한 삶을 헛되지 않게 하십니다. 값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죽을 것 같은 고난도 이길 힘을 주셔서 감당하게 하시고, 아무 가치 없이 죽음으로 끝났다고 생각하는 일들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일이 되게 하십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