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통합뉴스 박기성 칼럼리스트 | 내가 사는 동네 골목의 어느 집 담벼락에 담쟁이가 달라붙어 있습니다. 거의 매일 이 골목을 지나야 하기에 자연스레 담쟁이를 보게 됩니다. 그렇게 푸르던 담쟁이 잎에 어느 덧 단풍이 들기 시작합니다. 이내 저 잎들도 하나 둘 덩굴로부터 떨어져 나갈 테지요. 6년 전, 체코 프라하 성의 사슴계속 맞은편에 있는 왕가의 정원 담벼락에서 본 담쟁이는 지금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도종환 님의 <담쟁이>를 떠올리며 담벼락의 담쟁이를 꽤 긴 시간 동안 바라보았었습니다. 도종환은 이 시에서 담쟁이를 절망의 벽을 타고 넘어가는 희망자(希望者)로 노래했습니다. “저것은 벽 /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 그때 /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특별한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 담쟁이는 같은 영감을 주는 것 같습니다. 오 헨리(O. Henry)도 자신의 단편 <마지막 잎새>에서 심한 폐렴으로 삶의 의지를 잃은 존시에게 희망을 준 소재로 담쟁이를 사용했습니다. 무명의 여류 화가 존시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담쟁이덩굴에서 잎이 다 떨어지면 자신의 생명도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전국통합뉴스 박기성 칼럼리스트 | 국내 모 갤러리가 지문 때문에 소송을 당했습니다. 이 갤러리에서 미국의 대표적인 작가 도널드 저드의 조각품을 전시했는데, 지문 때문에 작품이 손상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저드 재단(Judd Foundation)의 주장이니 결과는 두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지문(指紋)은 사람마다 각기 다릅니다. 그래서 아주 옛날부터 지문은 도장을 대신하여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을 지장(指章)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지문은 신분을 증명하는 데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B.C. 18세기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시대에 계약문서에서 지문이 사용되었고, 중국 진나라 시대(B.C. 900-206년)에도 계약 문서에 지문이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8년 김신조 사건이 발생한 이후, 지문 날인이 포함된 주민등록증 발급이 법제화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성인이 아니더라도 실종을 대비해 지문을 등록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문이 찍혀 있어야 할 곳이 계약서나 주민등록증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목사이자 신학자인 싱클레어 퍼거슨에 의하면, 우리의 성경에도 자신의 지문이 찍혀 있어야 합니다.
전국통합뉴스 박기성 칼럼리스트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피타고라스의 제자 중 한 사람이 헌신 깁는 것을 업으로 하는 신기료 장수에게서 신발 한 켤레를 샀습니다. 신발값은 다음에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약속한 날이 되자 그는 돈을 가지고 신기료 장수에게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신기료 장수는 죽어 있었습니다. 그는 신발을 공짜로 갖게 되었다며 속으로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양심의 가책으로 매일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돈을 들고 다른 사람이 주인이 된 그 제화점에 찾아가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가 죽었지만, 내게는 살아 있습니다.” 미국 인디언들은 양심을 ‘삼각형’으로 생각했습니다. 만일 누군가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나쁜 행동을 하면 삼각형의 모서리 뾰족한 부분이 닿아서 아픔을 느끼게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이 반복되다보면 삼각형의 모서리가 달아 뭉그러져서, 또는 양심에 굳은살에 생겨 아픔을 크게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양심이 무디어졌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좋지 못한 행동을 했을 때에 느끼는 아픔의 크기만큼 양심도 건강하다는 의미입니다. 얼마 전에 동기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운전이 서툰 딸이 운전연습을 하다
전국통합뉴스 박기성 칼럼리스트 | 며칠 전 드라마 <모범형사 2>가 종영되었습니다. 16부작 전편을 시청한 것은 아니지만 띄엄띄엄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편에서 형사 강도창의 대사는 가슴을 뭉클하게 해 주었습니다. 강도창은 살인사건의 진범을 찾은 후 병원을 찾습니다. 그곳에 억울하게 죽은 정희주의 할아버지가 입원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혼수상태인 채로 침대에 누워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강도창은 “진범을 잡으면 뭐하냐”며 범인을 늦게 잡은 자신을 자책합니다. 그 옆에서 이 말을 듣던 이은혜가 “아저씨는 형사로서의 일을 다 하신 거예요”라며 위로합니다. 그러자 강도창이 울먹이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죽은 정희주 생각할 때마다 너무 아파서, 이렇게 아파하는 할아버지 생각할 때마다 내가 너무 아파서 미친 듯이 진범 잡으려고 뛰어다니 거다.” 할아버지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강도창의 진심이 전해진 듯 그가 병실을 떠난 뒤 감은 눈 너머로 조용히 눈물을 흘립니다. 강도창은 형사라는 직업의식만으로 진범을 잡으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피해자 가족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낀 것입니다. 갈릴리의 나사렛 근처에 <나인
전국통합뉴스 박기성 칼럼리스트 | 자주 방문하는 어느 교회의 앞마당에서 꽃대 하나를 보았습니다. 꽃대에는 붉은 빛을 띤 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석산(石蒜)이라고도 불리는 꽃무릇입니다. 어떤 이는 상사화(相思花)라고도 부릅니다만, 사실 상사화와는 다른 꽃입니다. 굳이 둘의 관계를 말한다면 사촌 정도일 것입니다. 상사화는 봄에 잎이 나고 7~8월에 꽃을 피웁니다. 반면에 꽃무릇은 9월 중하순 경에 꽃을 먼저 핀 다음에 꽃이 지고 꽃대가 사그라질 때에 비로소 잎이 나옵니다. 그러니 꽃과 잎은 서로를 그리워하지만 만날 수 없는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인 게지요. 그래서 꽃말도 “슬픈 추억” 또는 “이룰 수 없는 사랑”입니다. 꽃말처럼 꽃무릇은 슬픈 전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옛날에 불도를 닦던 스님이 불공을 드리러 온 여인에게 반해 가슴앓이를 하다가 상사병으로 피를 토하며 죽었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피어난 꽃이 바로 꽃무릇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꽃무릇은 사찰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사실은 꽃무릇의 뿌리에 방부제 성분이 있어서 탱화나 단청의 재료가 되기 때문이지요. 작년 이 즈음에 아내의 생일을 기념할 겸 남쪽으로 바람을 쐬러 갔을 때에 영광 불갑산
전국통합뉴스 박기성 칼럼리스트 | 서양에서 들어온 파라하여 양파(洋파)입니다. 긴 장마를 지나면서 양파가 썩었습니다. 제대로 건조시키지 못한 채 보관한 탓입니다. 그래서 화단에 묻었습니다. 얼마 후 신기하게도 그곳에서 싹이 돋았습니다. 버림받은 양파들이 살아보겠다며 흙을 헤치고 생명을 밀어 올린 것입니다. 양파(히브리어 ‘베첼’)는 성경에 한 번 등장합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행진하던 중 이집트에서 먹던 채소를 몹시 그리워하면서입니다(민 11:5). 그만큼 양파가 당시에도 대중적이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피라미드를 건설할 때에 동원된 노동자들에게 양파를 먹였다고 합니다. 양파에 피로회복과 스테미너 강화에 좋은 성분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에서는 올림픽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에게 양파즙을 먹였고, 로마의 검투사들에게도 양파를 먹게 했습니다. 종종 양파는 부정적인 의미와 관련하여 사용될 때가 있습니다. “까도 까도 나온다”라는 표현이 그런 예입니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거나 비리 등 좋지 못한 것들이 계속해서 밝혀질 때에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누군가로부터 “양파 같은
전국통합뉴스 박기성 칼럼리스트 | 새벽 1시에 앰블런스를 타고 응급실로 급행한 어머니를 만난 것은 5시간 후인 새벽 6시 즈음이었습니다. 20년 넘게 투석을 받은 탓에 심장마저 망가져 급기야 그 새벽녘에 앰블런스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중환자실에서 만난 어머니의 첫 말씀은 “죽는 줄 알았어!”입니다. 평소에 “하나님이 빨리 데려가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밥 먹듯 하신 것과는 사뭇 다른 말씀입니다. 이성과 본능은 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쨌든 긴급 시술을 통해 안정을 되찾았으니 천만 다행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중환자실 면회가 금지되었기에 그 때 이후로 이틀 동안 어머니의 얼굴을 뵙지 못했습니다. 드디어 오늘 오후에는 일반병실로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상주 보호자인 나는 아침 일찍 PCR검사를 받고 하루 종일 어머니가 중환자실에서 나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아들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할머니는 어떠시냐면서 친구의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동갑내기 신학대학 친구가 암에 걸렸다는 겁니다. 그동안 아무런 증상도 없었는데, 전이가 심해서 손쓸 수조차 없을 지경이라고 합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입니다. 겨우 스물아홉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 중환자실
전국통합뉴스 박기성 칼럼리스트 | 집에 온 아들, 그리고 우리 부부가 함께 거실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TV에서는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이 재방송되고 있었습니다. 갯벌에서 낙지를 잡는 99세의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촬영하는 젊은 감독조차도 쉽게 따라다니지 못할 정도로 갯벌에서의 할아버지의 기력은 대단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맨 손으로 갯벌을 헤집으시더니 커다란 문어를 손에 쥐고 의기양양하게 촬영감독에게 보이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내가 말했습니다. “낙지는 왜 생김새가 저렇게 생겼을까?” 옆에 있던 아들이 검지 손가락을 위로 치켜 세우며 말했습니다. “그건 저 윗분에게 물어봐야죠.” 하긴 낙지의 생김새가 그 모양인 것이 낙지 잘못은 아니지요. 굳이 탓할 이를 찾아야 한다면 창조주이겠지요. 하지만 바울은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롬 9:20)고 말합니다. 한 덩이의 진흙으로 귀히 쓸 그릇을 만들지 아니면 천히 쓸 그릇을 만들지는 전적으로 토기장이의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낙지가 그렇게 생긴 것에 대해 누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입니까? 이왕 만들어 주시
전국통합뉴스 박기성 칼럼리스트 | 어느 성도님이 제가 쓴 글을 읽으시고 문자를 보내셨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그 성도님이 또 다른 글을 읽으시고는 이렇게 문자를 보내셨습니다. “목사님,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위의 글은 잘 모르겠는데요. ㅎㅎ 샬롬” 주보를 통해 매주 성도들과 함께 나누는 글에 대해 어떤 이는 감동을 받고, 또 어떤 이는 무감동으로 읽습니다. 또 같은 읽는 이라도 어떤 글에 대해서는 감동을 받고, 또 어떤 글에 대해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글이 되기도 합니다. 어찌 모든 글이 성도 각각의 마음에, 그리고 모든 순간에 감동을 줄 수 있겠는지요.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설교라도 어떤 이는 ‘아멘’으로 화답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무거운 머리를 지탱하느라고 안간힘을 쓰기도 합니다. 또 같은 설교자의 설교를 들으면서도 어떤 설교에는 은혜를 받고, 또 어떤 설교에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기도 합니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겔 2:7)라고 말씀하셨으니, ‘듣는 이의 반응에는 관계없이 전하기만 하면 되지!’라고 설교자 스스로에게 위로의 말을 전해 보기도 합니다.
전국통합뉴스 박기성 칼럼리스트 | 연일 내리는 폭우(暴雨)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새삼 물의 엄청난 위력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깨닫게 됩니다. 얼마나 물의 힘이 강하고 무서우면 물 마귀라는 뜻의 수마(水魔)라고 부를까요.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물에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여 두려워하기도 하고 숭배하기도 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7월 중순에 홍수 맞이 축제를 벌였습니다. 이때 이집트인들은 홍수의 신 ‘하피(Hapy)’에게 제물을 바쳤습니다. 천연 제방 덕분에 홍수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던 이집트 사람들에게 홍수로 인해 범람하는 지역의 땅은 오히려 물이 빠진 후에 더욱 수월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물 빠진 기름진 땅에 그저 씨를 뿌리기만 해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고대 이집트인에게 홍수는 통제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순응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메소포타미아지역은 달랐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역시 강의 혜택을 받는 곳이었지만 이집트와는 달리 천연제방이 없기에 매년 반복되는 홍수는 애써 만들어놓은 수로와 농지를 파괴시켜버렸습니다. 그러니 메소포타미아인에게 물, 즉 홍수는 두려움의 존재요 통제되어져야 할 대상이었습
전국통합뉴스 박기성 칼럼리스트 | “아~~!” 누수탐지를 위해 오신 아저씨의 비명입니다. 사택이 지어진지 오래되어 종종 누수현상이 발생합니다. 이번에도 누수가 되어 누수탐지업체에 연락하여 전문가를 불렀습니다. 그분이 집안의 모든 수도밸브를 잠그기 위해 보일러실 쪽으로 가는 것까지는 보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비명을 지른 것입니다. 보일러실 쪽에서 뛰어나오는 그분은 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만지고 있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분은 “벌~ 벌~”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보일러 실 쪽에 벌집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저씨는 위협을 느낀 벌에게 ‘일침’을 받게 된 것이지요. 동작 빠른 아내가 벌레물린 데에 바르는 약을 가져와서 아저씨의 목을 문질러 드렸습니다. 사무실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어디선가 “아~~!”라고 외치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남의 집에서 나는 소리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내 휴대폰에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전기 검침원인데요. 계량기 함 안에 벌집이 있어요~!” 전화를 받고 계량기 함이 있는 곳으로 가 보았습니다. 조금은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함을 열었습니다. 과연 그 안에 벌들이 집을 짓고 있었습니다. 계량기 함 앞쪽의 아주
전국통합뉴스 박기성 칼럼리스트 | 초등학교 3학년인 혁이는 공룡을 좋아합니다. 나만 보면 내 팔을 붙잡고 컴퓨터가 있는 곳으로 끌고 갑니다. 공룡이 나오는 동영상을 틀어달라는 행동입니다. 그가 원하는 공룡 동영상을 틀어주면 더 이상 혁이에게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그렇게 몇 시간이든 컴퓨터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환호성을 지르고, 때로는 두 손을 번쩍 들고 흔들고, 또 때로는 펄쩍펄쩍 뛰며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혁이에게 물었습니다. “공룡이 좋아?”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합니다. “공룡이 왜 좋아?” 하지만 대답은 없습니다. 여전히 그의 눈은 모니터 속 공룡에게 향해 있고, 나에게도 공룡을 보라는 듯 자기 손가락을 연신 공룡을 가리킵니다. 많은 아이들이 공룡을 좋아합니다. 지금은 서른이 가까운 우리 아들도 어렸을 때에 그랬습니다. 아이들이 왜 그토록 공룡을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떤 이는 지금은 사라진 공룡에 대한 신비감 때문에 공룡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작고 약한 자신을 자신보다 덩치가 크고 힘이 센 공룡에게 투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공룡처럼 자신도 강하고 싶은 마음이 반영된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