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통합뉴스 박기성 칼럼리스트 | 새벽 1시에 앰블런스를 타고 응급실로 급행한 어머니를 만난 것은 5시간 후인 새벽 6시 즈음이었습니다. 20년 넘게 투석을 받은 탓에 심장마저 망가져 급기야 그 새벽녘에 앰블런스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중환자실에서 만난 어머니의 첫 말씀은 “죽는 줄 알았어!”입니다. 평소에 “하나님이 빨리 데려가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밥 먹듯 하신 것과는 사뭇 다른 말씀입니다. 이성과 본능은 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쨌든 긴급 시술을 통해 안정을 되찾았으니 천만 다행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중환자실 면회가 금지되었기에 그 때 이후로 이틀 동안 어머니의 얼굴을 뵙지 못했습니다. 드디어 오늘 오후에는 일반병실로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상주 보호자인 나는 아침 일찍 PCR검사를 받고 하루 종일 어머니가 중환자실에서 나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아들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할머니는 어떠시냐면서 친구의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동갑내기 신학대학 친구가 암에 걸렸다는 겁니다. 그동안 아무런 증상도 없었는데, 전이가 심해서 손쓸 수조차 없을 지경이라고 합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입니다. 겨우 스물아홉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여든 하나의 노인과 몸에 퍼진 암 덩어리로 날 벼락을 맞은 스물아홉의 청년 사이에 있는 벽이 너무나 얇게 느껴집니다. 나는 중환자실 문 앞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아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나이의 많고 적음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소름끼치도록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故 이어령 선생이 올해 2월에 췌장암으로 별세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다가옴을 느끼며 생의 마지막 순간들을 일기 형식으로 남겼습니다. 그 기록은 <눈물 한 방울>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져 세상에 남겨졌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차라리 아픔에 감사했습니다.
아프다는 것은 아직 살아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정작 두려워한 것은 아픔이 아니라 “살아있다는 신호가 멈추고 더 이상 아프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죽음은 아픔이라는 살아있음의 신호가 멈춘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시대의 지성 이어령 선생조차 암 선고를 받은 날 밤에 처음, 어머니의 영정 앞에서 울었다지 않습니까. “엄마 나 어떻게 해.”라면서요.
하지만 이어령 선생은 그답게 죽음을 아름답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또 다른 책 <마지막 수업>에서 “죽음의 자리는 낭떠러지가 아니라 고향”이라면서 죽음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죽음이란, 밖에서 신나게 놀고 있을 때 엄마가 집에서 ‘밥 먹으러 들어와!’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드디어 중환자실의 문이 열리고 가녀린 몸을 태운 이동식 침대 하나가 남자 간호사 선생에 의해 끌려 나왔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이 내게로 향했습니다. 까만 얼굴에 옅은 생기가 돌았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생명을 연장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더불어 스물아홉의 그 청년 전도사의 얼굴에도 생기가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