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연합뉴스 박기성 기자 | 지방 목사님들과 함께 제주도에 부부 수양회를 다녀왔습니다. 공항에서 가장 먼저 우리 일행을 맞이한 이는 “혼저옵서. 환영합니다”라는 문구의 양 옆에 서 있는 돌하르방 한 쌍이었습니다. 돌하르방은 제주 방언으로 ‘돌 할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제주도를 여행하는 내내 곳곳에서 볼 수 있었던 돌하르방은 이름과는 달리 할아버지보다는 젊은이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또한 오리지널 중에는 가슴이 돌출된 여성의 모습을 한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름이 하르방이 되었을까요? 사실 돌하르방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그전에는 우석목, 박수머리, 옹중석으로 불리었습니다. 그 중 옹중석(翁仲石)은 중국의 진시황 때에 흉노족이 두려워했던 원옹중(阮翁仲)이라는 사람의 이름입니다. 흉노족은 옹중을 보기만 해도, 심지어는 그가 죽은 후에 사람들이 수호신 삼아 세워 놓은 그의 상(像)을 보고도 도망을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선 영조 때에 제주에 흉년과 전염병이 창궐하자 제주 목사 김몽규가 죽은 원귀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옹중석을 만들어 세워 놓았는데, 하필 옹중(翁仲)의 ‘옹’이 ‘늙은이’를 뜻하기에 제주 방언으로 ‘하르방’이 된
전국연합뉴스 박기성 기자 |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어릴 적에 아버지는 개 한 마리를 키우셨습니다. 그 개가 여러 마리의 새끼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마리는 다른 강아지들보다 작고 약했습니다. 그 강아지를 아버지는 ‘무녀리’라고 불렀습니다. 무녀리는 본래 ‘문(門) 열이’입니다. 한 배에서 나온 여러 마리 새끼 중에서 어미의 자궁 문을 제일 처음 열고 나왔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닫혀 있는 태의 문을 열고 나오느라 모든 힘을 소진한 무녀리는 그 뒤에 나온 다른 새끼들보다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무녀리에게 유독 신경을 쓰셨습니다. 어미 젖꼭지 쟁탈전에서 매번 밀려나가기만 하는 무녀리를 손으로 들어 어미 젖꼭지를 물게 도와주었고, 행여나 잘못될까봐 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사람에게도 무녀리가 있습니다. 즉 ‘약하고 부족한 사람’입니다. 부모는 같은 자식이지만 그 중에 약하고 부족한 자식에게 관심을 더 쏟을 수밖에 없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지만, 사실 그 중에서도 더 아픈 손가락이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목사에게도 더 특별히 마음이 가는 교인이 있습니다. 교인이 많았던 예전 교회에서도 그랬고, 교인이 적은 지금의
전국연합뉴스 박기성 기자 |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생활 복지사 선생님에게 큰 소리로 울먹이며 외칩니다. “선생님은 나빠요. 나쁜 선생님이에요.” “그래. 나는 나쁜 선생님이야. 그러니까 나는 계속해서 하게 할 거야!” 종종 자원봉사를 위해 방문하는 아동센터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임에도 여전히 한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아이에게 복지사 선생님이 매일 30분에서 1시간씩 한글 공부를 시킵니다. 나는 아동센터에 방문할 때마다 그들의 실랑이를 목격합니다. 아이는 필사적으로 선생님에게 대듭니다. 선생님도 필사적으로 한글 공부를 시킵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아이에게 ‘나쁜 선생님’이 됩니다. 그런데 그들의 관계는 묘합니다. 아이는 그렇게 하기 싫은 한글공부임에도 그 시간을 빼먹지 않습니다. 한글공부를 하고 싶다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공부가 시작되면 아이는 “힘들어요. 그만 할래요. 선생님은 나쁜 선생님이에요”를 반복합니다. 이 정도면 선생님도 “알았다. 그만 하자! 나도 지겹다”라고 할만도 한데, 선생님은 끝까지 아이에게 공부를 시킵니다. 그들을 매번 바라보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볼 때에 그들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입니다. 이 세상에는 때로 ‘나쁜 사람’이 필
전국연합뉴스 박기성 기자 | 아침마다 성경읽기를 합니다. 오늘은 또 한 번의 성경통독이 끝나는 날입니다. 성경의 끝,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의 끝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입니다. 이 말에 해당하는 아람어는 ‘마라나 타(marana-tha)입니다. 유대인들이 ‘샬롬’이라고 인사하듯이,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의 ‘마라나 타’라는 말로 인사했습니다. 혹은 여기에 ‘예수’의 이름을 넣어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마라나 타’를 과거형인 ‘마란 아타(maran-atha)’로 읽으면 “주님이 오셨습니다”라는 뜻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이 ‘마라나타’에 대한 이 두 가지 해석(난외주 참조)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이와 같이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미’ 오신 주님을 믿었고, ‘또 다시 오실’ 주님을 고대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사이에서 산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이’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환난과 박해 속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저자인 요한이 그랬고, 요한계시록을 읽은 독자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이 그와 같은 환난
전국연합뉴스 박기성 기자 | 모 정당의 대통령 후보 토론회가 끝난 후 후보들 중 두 사람이 언성을 높이며 충돌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언성을 높인 것은 상대의 공격이 너무 과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기분이 상한 것입니다. 하지만 기분이 상할 때만 언성을 높이는 것은 아닙니다. 몹시 사랑하기 때문에 언성을 높이기도 합니다. 바울과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은 깊은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은 할 수만 있었다면 그들의 “눈이라도 빼어서”(갈 4:15) 바울에게 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는 ‘다른 복음’(갈 1:6)이 들어왔습니다. 성도들 중에는 ‘다른 복음’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 ‘언성’(갈 4:20)을 높이겠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향해 ‘언성’을 높이려 마음을 먹은 것은 그들을 사랑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볼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언성을 높여서라도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랐습니다. 언성을 높여서라도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갈 4:19)이 이루어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전국연합뉴스 박기성 기자 | 우리교회 근처의 골목길에는 큰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10월 즈음이 되면 이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열매들로 인해 골목길은 고약한 냄새로 채워집니다. 비록 좁은 골목길이지만 생각보다 많은 자동차들이 통행하는데, 그 자동차들의 바퀴에 눌려 은행의 외피가 터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반복되다보니 길은 지저분해지고 고약한 은행 특유의 냄새가 골목길을 지나는 이들의 코를 자극합니다. 은행(銀杏)이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것은 동물이나 벌레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에게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인 셈입니다. 일종의 종족 보존을 위한 방어기제입니다. 그런데 은행(銀杏)처럼 자신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냄새를 내뿜는 식물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자신에게 가까이 오도록 유혹하기 위해 냄새를 내뿜는 식물도 있습니다. 사과나무나 매실나무 같은 꽃들이 그렇습니다. 그 꽃들은 수분(受粉)을 하기 위해 향기를 내 뿜어 벌과 나비를 불러들입니다. 이 또한 종족보존을 위한 수단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마태복음 11장을 읽고 묵상했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험악한 세상에서 교회가 생존(?)하려면 어떤 방법을 선택해야 할지를
전국연합뉴스 칼럼리스트 박기성 기자 | 우리 고향의 송편은 반달모양입니다. 그래서 나는 송편이 반달모양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강원도 속초가 고향인 처가의 송편을 보고 다른 모양의 송편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강원도의 송편은 둥근 모양에 겉면을 손가락으로 꾹 누른 ‘손도장 송편’입니다. 심지어 쌀가루가 아닌 감자녹말로 만든 ‘감자 송편’도 있습니다. 추석 하루 이틀 전 우리 집 툇마루에서는 온 가족이 모여 송편을 빚었습니다. 온 가족이라야 겨우 4명이었지만 온 식구가 함께 모여 음식을 만드는 일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것도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말입니다. 어릴 적에 송편을 빚었던 경험이 성인이 되어 큰 도움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아내를 따라 처가에 처음 인사를 하러 갔을 때에 마침 장모님이 만두를 빚고 계셨습니다. 장모님이 빚고 계시는 만두 모양이 영락없는 우리 고향의 송편모양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음식을 만드는 일이 여자들만의 역할로 생각했던 시절이기에 선뜻 장모님 앞에 앉아 만두를 멋지게 만드는 내가 마음에 드셨던 듯 했습니다. 옷 더러워진다며 만류는 하셨지만 흐뭇해하시는 속마음을 감추지는 못하셨습니다. 토요일 밤에 선배 목사님
전국연합뉴스 칼럼리스트 박기성 기자 | 우리지방 사회평신도부 총무님이 식혜를 만들어 보내셨습니다. 물론 내게만 보낸 것은 아니고, 지방 모든 목사님들께 보내셨습니다. 식혜는 고두밥에 엿기름 우려낸 물을 부어 삭힌 음식입니다. 이것을 우리 고향 익산에서는 ‘감주(甘酒)’라고도 부릅니다. 하지만 어떤 분들은 식혜와 감주를 구분하기도 합니다. 좁은 의미의 감주는 엿기름 대신 누룩을 넣고, 이것을 더 발효시키면 알코올 형태가 됩니다. 그래서 ‘단술(甘酒)’입니다. 어떤 시인은 식혜 속에 ‘단맛’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아린 맛’도 들어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식혜를 좋아하셨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에게 식혜는 아버지 보다는 ‘어머니에 대한 아린 맛’이 큽니다. 어머니는 명절 때마다 식혜를 만들어 두 아들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몸 하나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시기에 식혜를 만들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더 이상 어머니의 식혜를 맛 볼 수 없습니다. 더울 때는 냉장고에서 꺼내어, 추울 때는 살얼음과 함께 마신 식혜는 그냥 음식이 아닙니다. 고향이자 그리움입니다. 그런데 식혜의 맛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엿기름입니다.
전국연합뉴스 칼럼리스트 박기성 기자 | 치과에 가서 이(齒)를 뽑았습니다. 10년 여 년 전부터 뽑아야 한다고 그랬는데 지금까지 와 주었으니 오래 버텨 주었습니다. 이를 뽑으면서 어렸을 때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 때에는 너나할 것 없이 대부분 유치(乳齒)를 뽑을 때 실에 묶어 잡아당겨 뽑았습니다. 그렇게 뽑힌 이빨은 초가지붕 위로 던져졌습니다. 그래야 튼튼한 새 이빨이 난다면서요. 그러한 행동의 의미를 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감염주술(contagious magic)’이었습니다. 지붕에는 쥐가 많이 살았습니다. 설치류(齧齒類)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쥐는 튼튼한 이빨을 가진 동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빠진 이빨을 지붕 위에 던져주면 쥐가 그것을 물어가게 되고, 그러면 쥐의 이빨처럼 아이에게도 튼튼한 이빨이 나오게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다래끼가 난 사람이 속눈썹을 뽑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의 돌 위에 올려놓고 다른 사람이 그 돌을 차게 함으로 다래끼가 그 사람에게로 옮겨가게 하는 믿음과 아들을 많이 낳은 부인의 속곳을 훔쳐 입음으로 자신도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생각도 감염주술의 좋은 예입니다. 그런데
전국연합뉴스 칼럼리스트 박기성 기자 | 남 권사님으로부터 카톡이 왔습니다. 커다란 붕어 사진을 찍어 보내셨습니다. 남 권사님이 사시는 아파트 바로 앞에는 유등천이 흐릅니다. 남 권사님의 남편 되시는 윤 권사님은 시간 여유가 날 때면 이곳에서 낚시를 하십니다. 윤 권사님이 붕어를 낚으신 모양입니다. 붕어 사진 아래에는 “윤 권사 2마리유~”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종종 팔뚝만한 붕어를 낚았다며 자랑을 하시곤 했는데, 드디어 실물 사진을 내게 보내어 증명하신 것입니다. 갈릴리 해변을 거니시던 예수님은 호수에 그물을 던지는 베드로와 안드레를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부 출신의 베드로와 안드레가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번역에서 ‘낚는’의 어감(語感)이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낚다’라는 표현이 오늘날에는 부정적인 의미로도 쓰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보이스 피싱(voice fishing)이라는 말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속아서 피해를 당했을 때에 “낚였다”라고 표현합니다. 차라리 존 로스가 번역
전국연합뉴스 칼럼리스트 박기성 기자 | 100주년기념교회를 퇴임하고 경남 거창으로 낙향하여 살고 있는 이재철 목사가 작년(2020년)에 한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는 이 책을 합천 해인사에서 찻집을 운영하는 주인과의 대화로 시작했습니다. 50대의 찻집 주인은 해인사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여성입니다. 그분이 어릴 적에 친구들과 백련암(白蓮庵)을 찾아가면, 성철 스님이 언제나 반가워하며 사탕을 주셨다고 합니다. 당시 외딴 마을에서는 구경조차 하기 어려운 사탕이었습니다. 그래서 소녀는 사탕이 먹고 싶으면 한 시간 길을 멀다 않고 백련암을 찾았고, 성철 스님은 그 소녀를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고 매번 사탕을 주셨습니다. 성인이 된 그 분은 결혼과 동시에 서울로 이주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해인사의 숨결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마음속에서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나기만 했습니다. 결국 그분은 자식을 결혼시킨 후 남편의 양해 하에, 십 년 전부터 해인사로 내려와 찻집을 운영하고 있는 중입니다. 해인사에 오랫동안 살아온, 그분은 많은 스님들의 일화를 알고 있습니다. 이재철 목사가 그분에게 물었습니다. “요즈음 스님들은 어떠세요?” 그러자 오히려 그분이 이
전국연합뉴스 칼럼리스트 박기성 | 가깝게 지내는 몇몇 목사님들과 안부 전화를 주고 받았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 중에 공통된 말들이 있었습니다. “말세 인가봐!” “종말이 오긴 오려나봐!”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두고 한 말들입니다. 전대미문의 전 세계적인 코로나 팬데믹이 그렇고, 기후변화로 인한 화재와 홍수가 모든 대륙에 걸쳐 발생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 모든 현상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수록 두렵고 떨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현상 자체보다도 더 두렵고 떨리는 것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마지막 날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사는 대전은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염려가 되어 코로나 검사(PCR)를 선제적으로 받아보기로 했습니다. 가까운 보건소에 가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검사를 받기 위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뒤에 서서 대기하는 동안 괜히 마음이 떨렸습니다. 코로나 19 확진자와 밀접 접촉한 적도 없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장소에 간 적도 없지만 혹여나 검사 결과가 ‘양성으로 나오면 어쩌나!’라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드디어 내 차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