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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

[박기성 칼럼]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전국연합뉴스 박기성 기자 | 아침마다 성경읽기를 합니다. 오늘은 또 한 번의 성경통독이 끝나는 날입니다. 성경의 끝,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의 끝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입니다. 

 

이 말에 해당하는 아람어는 ‘마라나 타(marana-tha)입니다. 유대인들이 ‘샬롬’이라고 인사하듯이,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의 ‘마라나 타’라는 말로 인사했습니다. 혹은 여기에 ‘예수’의 이름을 넣어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마라나 타’를 과거형인 ‘마란 아타(maran-atha)’로 읽으면 “주님이 오셨습니다”라는 뜻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이 ‘마라나타’에 대한 이 두 가지 해석(난외주 참조)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이와 같이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미’ 오신 주님을 믿었고, ‘또 다시 오실’ 주님을 고대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사이에서 산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이’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환난과 박해 속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저자인 요한이 그랬고, 요한계시록을 읽은 독자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이 그와 같은 환난과 박해를 받은 까닭은 ‘이미’ 오신 주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환난과 박해, 심지어 죽음까지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오실’ 주님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인사했던 것입니다.

 

또한 ‘오실’ 주님이 ‘이기는 자’에게는 ‘생명나무의 열매’(계 2:7), ‘생명의 관’(2:10),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2:17),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2:26), ‘흰 옷’(3:5),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함’(3:12), ‘보좌에 앉게 함’(3:21) 등의 상을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이미’ 오신 주님과 ‘오실’ 주님, 즉 ‘이미’와 ‘아직’의 사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이 오실 때까지는 고난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오늘을 견뎌낼 수 있는 원동력은 ‘다시 오겠다’(요 14:3)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에 의지하여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믿음을 지키며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미’ 오신 주님은 견고한 ‘닻’이고, ‘오실’ 주님은 목표이자 승리의 상징인 ‘깃발’입니다. 

 

마라나 타, 주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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